유치원 기억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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칼럼칼럼

필자는 지시적으로 주입하는 교육은 유아들에게 독이 된다는 것을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9년간 부단히 애를 썼다. 그보다 더 오래전, 석성숲유치원 설립 이전부터 대학생, 현직교사, 학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특강에서도 자주 주제로 삼았었다. 이론적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. 20살부터 학생들을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, 억지로 가르친다고 해서 누구나 같은 결과를 얻을 수 없으며, 스스로 생각하려는 의지가 중요하다 것을 알게 된 경험도 작용했던 것 같다. 7년간 매주 쓴 교육 이야기에서도 주입식 교육의 폐해를 단골 주제로 삼았었다. 하지만 아쉬운 점이 있었다.

아주 오래전 필자가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에 빗대어 이론을 설명하는 것은 그 학생들의 유아기에 대한 자료가 없어 유아기의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인지 설명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. 교육학, 심리학, 최근에는 뇌 과학의 연구 결과를 정리하여 제시하고 유아기에 해야 하는 교육에 대해서 피력하였으나 그럼 주입식교육과 놀이를 병행하면 되는 것 아니냐는 어정짱한 타협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.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이 혼자 공부하는 시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자습했다고 말하면 일부 천재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된다.

이 모든 사례는 한 사람을 대상으로 유아기부터 계속 이어지는 과정을 추적 관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과관계를 설명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. 그런데 나와 함께 보낸 시간이 8~7년, 현재 나이가 11~10살인 학생들이 지금도 나와 함께 지내고 있고, 내가 그 학생들과 철학, 수학, 언어 등을 지도하면서 문득문득 느끼게 된다. 실제 사례 속에서 유아기 교육 방법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하고자 한다.

필자: 오늘은 각자 진도와는 상관없이 여러분이 수학과 과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좌표평면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요. (1~4사분면을 그렸다) 이렇게 X축과 Y축으로 되어 있는 좌표평면을 그리고 1~5까지 음의 방향도 같이 1~5까지 그려 주세요. (각자 공책에 쉽게 그린다.) Y축은 여러분이 유치원 때 숲에다 만들어 놓고 관찰하던 백엽상의 온도계를 생각하면 이해하기가 쉽지요?

학생들 : 백엽상이 뭐예요?

필자 : 기억이 안 나나요? 유치원에서 일주일 동안 열심히 만들었는데?

학생들 : 기억 안 나요.

필자 : 하얀 새집처럼 만들어서 온도계 넣어 놓고 관찰했던 사진도 있는데 기억이 없군요. 그런데 좌표평면은 어떻게 이해하고 그렸나요?

학생들 : 그냥 알았어요.

필자 : 아 그냥, 그럼 유치원 때 좌표 그려서 모양 만들기 놀이를 많이 했는데 그것도 기억 안 나요?

학생들 : 제가 유치원 때 그런 것도 그릴 수 있었어요?

필자 : 여러분은 지금 책을 많이 읽고 문해력도 높지요. 그럼 언제부터 어떻게 글을 읽게 되었나요?

학생들 : 잘 기억이 안 나요. 어떻게 읽었지? (웅성웅성, 여름반 때 그냥 읽었는데, 난 가을반 때 읽었나?)

이번 주 좌표평면에 대해서 11~10살인 학생들과 이야기를 주고받던 중에 유아기에 핵심어로 다루었던 온도계, 백엽상에 관해서 이야기를 했더니 학생들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그런 놀이를 한 적이 없다고 했다. 그런데 어떻게 Y축에 대해 이해를 하고 있냐고 물었더니 그냥 안다고 답했다. 글자를 어떻게 읽기 시작했는지 기억을 못 하고 있었다. 시작은 필자가 의도한 대화는 아니었으나 이 대화로 필자는 교육에 대한 많은 정보를 확인했다.

학생들은 유아기에 배운 지식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유아기에 익혔던 개념을 바탕으로 스스로 생각해냈다. 유아기에 경험한 학습은 단편적인 지식보다 긍정적 정서를 바탕으로 한 사고의 과정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. 학생들이 읽기를 어떻게 시작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대답해주어서 기뻤다. 적어도 학생들의 기억에 억지로 한글을 익혔던 나쁜 기억은 없다는 것이 확인된 것이다. 만약 이 학생들이 유아기에 즐겁게 학습하는 경험이 아니라 반복적이고 지겨운 지식 주입하기를 했다면 지금과 같은 대화는 없었을 것이다. 학습은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니지만 모르던 세상을 하나하나 알아가는 것이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안다면 좀 더 즐겁게 배워갈 수 있다. 이 학생들은 유아기부터 교육 과정에 모두 참여했기 때문에 이론과 실제를 연결하여 교육 방법의 정당성을 설명하게 되어서 다행이다. 유아기에 자발적으로 활동하는 경험 중에 한글 익히기, 영어교육, 수학 문제 풀기 중 하나라도 반복 학습을 했다면 그 과정은 분명 학습능력 발달에 방해요인으로 작용하는데 학생들 대부분이 가정에서도 유치원 교육에 협조해 주셨기에 좋은 학습 이미지를 가지게 된 것이다.

교육학박사 임은정의 2023. 01. 12 교육이야기